'회사령' 등 전력통제계획 下에 전기공급
민족자본의 전기회사는 개성전기가 유일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우리 경제를 마음대로 주름잡던 일본이 합방을 강행하자 조선총독부는 제일 먼저 ‘토지조사령’과 ‘회사령’을 공포했다.

회사령은 한국에서 공업적 기업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의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묶어 두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됐던 1910년 8월 당시 우리나라에 존립하고 있던 전기회사는 일한와사전기(주)·인천전기(주)·부산전등(주) 3개였으며, 발전설비는 1056kW 였다.

이밖에 사업허가를 받아놓고 설립을 추진 중이던 한국와사전기(부산)·진남포전기·원산수력전기 등 3개사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기간 중에 설립된 전기사업체는 총 25개였으나, 사업을 개시한 회사는 17개였다.

우리 민족자본으로 설립됐던 개성전기(주) 하나 만을 빼고는 모두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것들이며, 모두가 1910년대에 설립됐다.

당시 전기사업체의 대부분은 도시중심의 소규모 형태로 사업체 상호간의 연관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도시별로 분리된 소규모 배전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내연기관 발달에 연유한다. 흡입가스기관 또는 중유기관을 원동기로 하는 발전은 보일러를 사용하는 기력발전과는 달리 그 설비가 간단하며, 설비의 점유면적이나 공간이 적어도 됐다. 따라서 소액의 설비자금과 소수인원으로도 운영과 관리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전기회사는 10W 전등을 1000등 이상 사용하는 수요만 있으면 수지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므로 1921년 당시 제조업부문 평균자본금이 17만엔 내외일 때 전기회사는 5~6만엔 자본으로 손쉽게 발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손쉽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경우였고, 한국인의 경우에는 회사령 등을 가지고 민족자본의 성장을 음으로 양으로 견제한 총독부의 정책기조 밑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17년에 민족자본으로 발족한 개성전기는 개성이 오래된 상업도시인데다 인삼갑부들이 다수 있었고, 일본 거류민이 거의 없었다는 점 등으로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우리나라 각 도시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전기사업공영화운동은 모두가 한결같이 초기에는 전기요금 인하요구가 발단이 됐다가 그것이 끝내는 공영화를 쟁취하겠다는 격렬한 시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비싼 전기요금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에만 사로잡혀 있는 민간기업에 맡겨가지고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전기요금이 얼마나 비쌌는지는 같은 시기의 일본과 대비해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동경시내에서는 1911년 이래 설립된 동경전등(주)·일본전등(주)·시영전기(동경시 당국이 경영) 3자간에 전기요금 인하와 공급구역 확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계속해 왔다.

이로 인해 하나의 수용가구 안에 3개 사업체의 전기가 동시에 공급되는 극단적인 사례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이러한 3개 전기사업체 경쟁은 1917년 10월 상호간 공급구역 분할과 전기요금 공급조건을 균일하게 한다는 협정을 맺으면서 종전보다 38~69% 인하된 10촉광에 50전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던 한국거주 일본인들과 함께 신문이 가세해 전기요금 인하를 요구했고, 전기회사 경영자들은 회사설립 초창기에 낮은 배당과 석탄가격 상승을 이유로 요금인하는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하지만 수력에 의존하던 원산수전(주)보다 석탄을 주로 사용하던 경성전기(주)의 전기요금이 낮은 경우를 보면 설득력이 없었다.

일본 전기회사는 경쟁 속에서 요금인하와 설비확장을 하면서 수요를 창출한 반면에 한국의 경영자들은 독점의 혜택 위에 안위하면서 수요창출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전기사업은 총독부의 전기정책과 경영자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유로 전국에서 벌어진 공영화 열기 속에 평양에서 제일먼저 공영화가 이뤄졌으며, 이에 자극받은 각 도시는 공영화 운동이 가열됐다.

1931년말 총독부가 전력통제정책을 발표했으며, 발전사업의 민영원칙에 따라 각 기업이 앞 다투어 전원개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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